구분 | 상세 |
저자 | 이나다 도요시 |
출판사 | 현대지성 |
출간일 | 2022/11/10(목) |
후기 | ★★★★★ (3/5) |
들어가며
나는 소위 '한국인이 좋아하는 속도'로 영상을 감상하는 편이다.
특히 인터넷 강의를 들을 때 1배속은 너무 답답하다. 1.25배속, 1.5배속은 되어야 볼만하지 않나? 중간중간 아는 부분이 나오면 건너뛰어주기도 하고.
그래서 궁금했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 책으로 조명되어야 할 만큼 특이한가? 왜 이런 주제로 책이 나왔고 베스트셀러까지 되었을까?
총평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라는 명제를 중심으로 트렌드의 변화, 2030 세대의 특성을 풀어낸 책.
그동안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내용을 기대하였다면 살짝 실망스러울 수 있으나, 일상적인 풍경에 의문을 표하고 다양한 근거를 수집하여 주장에 살을 붙여가는 과정이 인상 깊다.
만약 미디어 업계 종사자라면 느끼는 바가 남다를 수 있겠다.
책은 제목처럼 영상에 관한 대중의 달라진 인식, 태도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을 조금만 곱씹어보면 도서, 음반, 게임 같은 다른 여흥 거리와도 무관한 이야기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문장 수집
대학생들은 취미나 오락에서 쉽게 무언가를 얻거나 빠르게 전문가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멀리 돌아가는 것은 꺼린다. 방대한 시간을 들여 몇백 편, 몇천 편의 작품을 보거나 읽는 과정,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기만의 관점을 얻는 과정, 결국에는 인생작을 만나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과정을 전혀 선호하지 않는다.
PC MMORPG가 직면한 과제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MMORPG는 게임 속 인물이 되어 전혀 다른 세계, 생활 방식을 익히고 타인과의 관계에 녹아들어야 하는 게임이다. 따라서 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것이 방대할 수밖에 없다. 또 게임이 제품으로서 한 번 출시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서비스로서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기 때문에 경험하고 배울 콘텐츠는 날로 늘어난다.
만화·애니메이션, 영화, 공연, 전시, OTT 서비스 등 즐길 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게이머에게는 게임 이외의 선택지가 너무나 많다. 이 같은 상황에서 풍성하고 깊이 있는 콘텐츠는 게임의 엣지가 아닌, 피로감만 불러일으키는 골칫덩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투자한 시간 대비 느낄 수 있는 자극의 강도가 중요해진 요즘 한때 게임의 미덕으로 손꼽혔던 도전적 난이도, 다채로운 콘텐츠, 현학적 스토리는 어느새 빛바래고 언제 어디서나 가용 시간을 활용하기 좋은 모바일 플랫폼, 빠르게 압축된 경험을 제공하는 로그라이크 장르가 대두되고 있는 건 (어려서부터 PC MMORPG와 친구처럼 자라온 입장에서 무척 슬프지만)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위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PC MMORPG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게이머에게 즐겁고 만족스러운 경험을 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며 읽은 구절.
핵심 요약
1.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 감상에서 소비로
바쁜 현대 사회에서 영화는 감상(보고 싶은 것)의 대상에서 정보 수집(알고 싶은 것)의 대상으로 변하고 있다. 사람들은 다른 이와의 대화에 참여하거나 스스로의 박식함을 뽐내기 위해 빨리 감기, 건너 뛰기, 패스트무비 등으로 영화를 접하고 있다. 1
2. 대사로 전부 설명해 주길 바라는 사람들 → 모두에게 친절한 세계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상업 작품일 경우, 다양한 이해력을 가진 관객 누구나 만족할 수 있는 '친절한 작품'이 칭찬 받는다. 가능한 대사를 통해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면서 관객 일부가 작품의 주제를 충분히 읽어내지 못하더라도 소외당하지 않게 다른 즐길 거리를 첨가하는 식. 저자는 이를 배리어프리 무비, 오픈 월드 게임 2에 비유한다. 3
3. 실패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 개성이라는 족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보편화되며 개인 간 연결이 강화되었다. 이른바 '공감을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대화에 끼기 위해 유행하는 콘텐츠를 소비한다.
개인이 소비하는 콘텐츠는 개인의 개성이 되기도 한다. 타자와 잘 어우러져야 하는 동시에 '색채가 뚜렷한 삶'을 지향하라 교육 받은 Z세대는 자신의 특색을 드러내기 위해 콘텐츠를 활용한다.
한편, 삶에 여유가 없는 Z세대는 시간 낭비, 실패를 두려워한다. 그들에게 스포일러는 훼방이 아닌 안심이다.
4. 좋아하는 것을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 '상쾌해야' 찾는다
고전적인 영화는 중반에 약간 가라앉더라도 후반에 되살아난다. 반면 최근 인기리에 상영된 영화에는 치명적인 위기가 적거나 없다. 불쾌한 것은 한순간도 보고 싶지 않다는 관객이 예상외로 많은 데다, 수없이 많은 콘텐츠 속에서 불쾌한 영화는 관객에게 닿을 기회조차 잡기 어렵기 때문에 제작사는 보다 상쾌한 경험을 만드는 데 집중하게 된다.
5. 무관심한 고객들 → 앞으로 영상 콘텐츠 시장은 어떻게 될 것인가
향후 콘텐츠 제작자들은 '코어 팬에게만 전달되는 양질의 작품'을 만들기 어려워질 것이다. 다시 말해 빨리 감기, 건너 뛰기를 하는 사람들이 주요 고객임을 전제로 활동해야 할 수 있다.
[표 1] '리퀴드 소비'로 설명한 빨리 감기, 건너 뛰기, 스포일러
마치며
저자는 책의 초반부터 중반까지 일관성 있게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것은 원작자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다."라며 "빨리 감기로는 영화의 미묘한 맛과 정교한 장치를 놓치지 쉽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후반부에 접어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빨리 감기 또한 영화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다. 나중엔 숨 쉬듯 당연한 문화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엥 🙄
일각에서는 이런 우디르급 태세 전환을 집필 초 자신과 사뭇 다른 생각, 행동을 접하고 놀란 저자가 여러 인터뷰 끝에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된 것이라고 해석할 듯하다. 하지만 나는 저자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저자의 이야기처럼 지금은 누구나 문화 콘텐츠를 접하고 그에 관한 의견을 공공연하게 남길 수 있는 시대다. 즉, 만약 누군가 한 콘텐츠가 자신에게 너무 어렵거나 자신을 비난하고 있다 받아들일 경우, "쓸데없이 난해하다. 잘난 척하는 꼴이 불쾌하다."라거나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비꼬면 있어 보이는 줄 안다." 같은 악평을 게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저자는 자료 조사 과정에서 이런 세태를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책이 대중에게 손가락질받다 소리 소문 없이 절판되는 상황이 두려워진 게 아닐까?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황급히 글을 마무리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껏 누구도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던 않았던 현상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름의 논리를 차근차근 만들어가는 게 재미있는 책인 만큼, 이런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마무리는 더욱 어설퍼보이고 아쉽기만 하다.
이런 면 외엔 꽤 읽어봄직한 책. 심심풀이로 추천한다!
- 영화 한 편을 10분 정도로 요약해 만든 영상. 제작자가 의도한 러닝 타임에 비해 훨씬 짧은 시간 안에 대략적인 줄거리, 결말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 시각 장애인과 청각 장애인을 염두에 두고 자막과 음성 해설을 포함하여 제작하는 영화. [본문으로]
- 제작자가 게이머의 이동 동선, 플레이 방식을 제한하는 대신 게이머 스스로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을 원하는 식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공간 및 경험을 창출하려는 과정에서 탄생한 장르. [본문으로]
- Liquid consumption.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회 전체가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시스템에 따라 형성된 고체(솔리드) 상태에서 특정한 형태를 갖추지 않고 자유롭게 모습을 바꾸는 액체(리퀴드) 상태로 변화해왔다고 지적했다. 즉 과거의 고정적인 소비를 솔리드 소비라고 한다면 최근의 유동적인 소비를 리퀴드 소비라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