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분 | 상세 |
저자 | 로제 카이와 |
출판사 | 문예출판사 |
출간일 | 2018/07/10(화) |
후기 | ★★★ (6.0/10.0) |
목차
들어가며
게임을 제작하거나 서비스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라고 권유받는 책들이 있다. 이전에 리뷰하였던 <라프 코스터의 재미 이론>이라든지 <검과 회로>, <게임 아키텍처 앤 디자인>, <아트 오브 게임 디자인>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백 날 책장을 넘기는 것보다 하나라도 많은 게임을 플레이해보는 게 좋다는 '실전파'도 있다. 책 속 견해와 현실은 다르다는 게 실전파의 주장이다. 또 여러 이론을 숙달한다 해도 회사와 게이머는 최근 주목받는 게임, 콘텐츠를 기획 및 제공해줄 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반면 '이론파'는 기초 닦기를 게을리 해선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유행하는 게임, 수익성이 좋다고 소문난 게임을 성실하게 플레이하다 보면 단기간 내 레퍼런스 풀이 상당히 넓어진다. 그래서 회의 도중 예시로 등장하는 게임을 빠릿빠릿하게 이해하고 차용할 만한 콘텐츠를 빠르게 제안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게임이 왜 그렇게 구성되었는지, 각 콘텐츠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스스로 고민하고 이해하여 응용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인사이트를 맨땅에서부터 길러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미 정제해둔 지식이 있는데 굳이 먼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점에서 나는 이론파에 가깝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것이 게임 디자인계의 고전 중 하나인 본서, <놀이와 인간>이다.
총평
"놀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철학적 답변.
놀이의 정의, 놀이의 종류, 놀이가 인간을 열광케 한 원동력에 대해 들여다보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문화가 어떻게 발전하여왔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놀이는 흔히 '흥미롭지만 미숙하고 비생산적인 행위'로 간주된다. 영유아의 블록 쌓기나 술래잡기, 청소년 및 성인의 온라인 게임과 카지노 게임이 대표적이다. 이 놀이들은 대개 시간을 재미있게 보내는 데 도움이 되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1
로제 카이와는 놀이를 보다 넓게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즉 놀이는 우리가 '게임'이라고 부르는 것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 여러 학문들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놀이는 이상적인 경쟁이 이루어질 수 있는 폐쇄적이고 인공적인 공간에서 행해지는데 이 같은 환경을 조성하는 것, 규칙을 만들고 고수하는 것, 승리하기 위해 능력을 배양하거나 충동을 억제하는 것 등이 법, 정치, 예술과 불가분 하다는 게 책의 대전제다.
또 이 책은 호모 사피엔스 이래 가장 놀라운 인간형의 발견이라 불리는 요한 호이징가의 역작 <호모 루덴스>에 비판을 던지는 책이기도 하다. 저자는 문화에 놀이 정신이 깃들어있다는 호이징가의 주장을 높이 평가한다. 다만, '경쟁(아곤)'과 '모의(미미크리)'만을 놀이로 보는 것은 불충분하며 '운(알레아)', '현기증(일링크스)'까지 아울러야만 진정한 의미의 놀이가 된다는 게 저자의 의견이다.
사회학이라는 카테고리 특성 상 경제/경영이나 자기 계발 서적보다 뜬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가 많고 번역까지 자연스럽지 않아 오랜만에 논문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 게임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해보고 싶거나, 게임을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거나, <호모 루덴스>를 인상 깊게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봄직한 책으로 보인다.
문장 수집
운명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여러 유리한 조건들을 활용하는 것도 놀이이며, 최고의 열성을 집중시키는 것도 놀이이다. 그리고 시효에 의해 소멸되지 않는 가혹한 우연을 일으키는 것도 놀이이고, 위험을 무릅쓰는 대담함과 빈틈없이 계산하는 신중함을 발휘하는 것도 놀이이며, 그러한 여러 두뇌활동을 조합하는 능력을 동원하는 것도 놀이이다. 그리고 그 두뇌활동 역시 놀이이다.
매일 놀이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에게 더없는 독려가 될 만한 문구라 선택했다.
핵심 요약
1. 놀이의 의의
1-1. 놀이의 의의
놀이는 문명의 진보를 추적할 수 있는 수단이다. 놀이는 고유한 권리, 의무를 규칙으로 삼는 활동인데 문명은 특권, 책임이 체계를 이루어 이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경쟁 놀이는 스포츠로 귀착되었고 모방과 환상의 놀이는 영화로 거듭났다. 또 우연과 조합 놀이는 확률 계산 등 수학 발전의 원천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놀이는 개인의 발전에도 기여한다. 여러 심리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힘, 기교, 계산 놀이는 아이의 성격 형성에 중대한 역할을 하는 훈련에 해당한다.
1-2. 놀이의 위험성
놀이는 현실을 떨쳐내고 한계를 극복하는 즐거움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사치스러운 행위로서 여가를 전제로 한다. 또한 놀이는 자발적인 행위이므로 강제할 수 없다. 이 말인 즉 배고픈 이, 싫증을 느낀 이에게 놀이의 의의를 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노동은 결과를 축적하여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인 반면, 놀이는 종료 시 결과를 폐기하기 때문에 비생산적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나아가 놀이의 뚜렷한 결과물이 남지 않는 허무감, 비현실성, 단순함은 놀이를 가벼운 것으로 여기게 한다. 이는 사람들이 현실의 시련을 접했을 때, 되려 그 가혹함에 적응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2. 놀이의 정의
놀이는 의지, 규칙이라는 두 가지 기준을 통해 네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구분 | 탈의지 | 의지 |
루두스 (Ludus, 규칙) 2 |
알레아 (Alea, 운) |
아곤 (Agon, 경쟁) |
파이디아 (Paidia, 탈규칙) 3 |
일링크스 (Ilinx, 현기증) |
미미크리 (Mimicry, 모의) |
구분 | 정의 |
아곤 |
- 규칙과 의지의 범주. - 아곤에서의 경쟁이란 놀이의 참여자가 하나의 자질(체력, 인내심, 기억력 등)을 두고 평등하게 싸울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설정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투쟁을 뜻한다. |
알레아 |
- 규칙과 탈의지의 범주. - 아곤과 반대로 놀이의 참여자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운에 기초하는 놀이를 가리키며 라틴어로 '주사위 놀이'를 뜻한다. |
미미크리 |
- 탈규칙과 의지의 범주. - 허구적인 하나의 세계를 일시적으로 받아들이는 놀이로 만들어진 환경에서 가상의 인물이 되어 그에 어울리게 행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
일링크스 |
- 탈규칙과 탈의지의 범주. - 일시적으로 지각의 안정을 파괴하고 맑은 의식에 일종의 기분 좋을 패닉 상태를 일으키려는 시도로 이루어져 있다. |
[표 1, 2] 놀이의 속성
규칙성의 유무는 각 놀이의 세부적인 방향성이 정해지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아곤 | 알레아 | 미미크리 | 일링크스 | |
파이디아 | 규칙이 없는 경주, 격투기 등 | 술래 결정을 위한 셈 노래, 앞뒤 놀이 | 어린이의 흉내, 공상놀이, 인형/장난감 무구, 가면, 가장복 | 어린이의 뱅뱅돌기, 회전목마, 그네, 왈츠 |
중립적 | - | 내기, 룰렛 | - | 볼라도레스 장터에서 타고 노는 장치 |
루두스 | 권투, 펜싱, 축구, 당구, 체스 등 스포츠 전반 | 복권 | 연극, 공연예술 전반 | 스키, 등산, 공중곡예 |
[표 3] 놀이의 분류와 예시
3. 놀이의 사회성
놀이는 개인적인 오락이 아니다.
예를 들어 기교 놀이에서 솜씨를 겨루려면 경쟁자가 필수적이다. 나아가 놀이의 참여자들이 대단한 기록을 세우려 애쓰게 하는 데에는 구경꾼이 필요하다. 이러한 놀이의 사회적 측면은 수많은 관습 곳곳에 깊이 녹아들어 있어 아곤, 알레아 4, 미미크리 5, 일링크스 6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다. 7
4. 놀이의 타락
저자에 따르면 놀이는 ① 자유롭고 ② 일상과 분리되어있으며 ③ 결과가 확정되어 있지 않으면서 ④ 비생산적이고 ⑤ 규칙이 있는 ⑥ 허구적 활동으로 규정할 수 있다. 즉 놀이는 현실과 대립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저자는 이 놀이가 일상 생활에 물드는 것을 일컬어 타락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놀이의 타락은 놀이와 일상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져 즐거움이었던 것이 고정관념이 되고, 도피였던 것이 의무가 되며, 기분전환이었던 것이 집착 내지 강박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림 1] 디즈니랜드 입구에서는 특별한 글귀를 만나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 당신은 오늘을 떠나 어제와 내일, 그리고 환상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Here you leave today and enter the world of yesterday, tomorrow and fantasy.)" 단순히 꿈결 같은 공간을 구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울타리 안팎에 확실한 차이를 두어 방문객의 몰입을 극대화한 것이다.
5. 놀이의 확대
5-1. 놀이의 조합
놀이의 속성은 따로 떨어져 있기보다 조합되어 나타나곤 하며 두 가지 속성이 짝지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곤 | 알레아 | 미미크리 | 일링크스 | |
아곤 | - | 카드 게임처럼 승자를 결정하는 방식에 실력, 운이 모두 관여하는 경우 | 운동선수, 연극배우 등을 향한 관객의 몰입 | 결합 불가 (규칙, 자제심 ↔ 현기증, 맹목적인 열광) |
알레아 | 카드 게임처럼 승자를 결정하는 방식에 실력, 운이 모두 관여하는 경우 | - | 결합 불가 (운, 속임수 ↔ 가장, 운명의 소리) |
운, 불운이 좌우하는 놀이에 몰입하며 발생하는 황홀한 상태 |
미미크리 | 운동선수, 연극배우를 향한 관객의 몰입 | 결합 불가 (운, 속임수 ↔ 가장, 운명의 소리) |
- | 종교에서 성스러움을 규정하는 공포, 매력이 혼합된 경험 |
일링크스 | 결합 불가 (규칙, 자제심 ↔ 현기증, 맹목적인 열광) |
운, 불운이 좌우하는 놀이에 몰입하며 발생하는 황홀한 상태 | 종교에서 성스러움을 규정하는 공포, 매력이 혼합된 경험 | - |
[표 4] 놀이의 조합
5-2. 놀이의 변천
저자에 따르면 가면과 영매 상태(미미크리, 일링크스)로 대변할 수 있는 원시 문화는 규칙과 기수법(아곤, 알레아)의 발전으로 인해 점차 현대화되었다.
현대 사회는 아곤의 영향력을 증대 시키려고 노력한다.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다 믿을 때, 구성원은 스스로를 갈고닦으며 사회에 보탬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공정한 경쟁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안다. 각종 제도를 보완한다 할지라도 가정환경, 유전 정보 등이 불균형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알레아는 구성원의 탈력을 보충한다. 누구나 일확천금을 노릴 수 있는 복권, 마치 개인의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 같지만(아곤) 다른 참가자나 출제되는 문제 등(알레아)에 따라 상금 취득 여부가 결정되는 퀴즈 쇼 등이 대표적이다.
마치며
서두에 다른 책은 몰라도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식으로 강권하지 않는 까닭은 비슷한 시기에 쓰인 책이 으레 그렇듯 서구중심주의적 사고가 군데군데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A라는 문화는 그 문화가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A로 유지될 수도, A'로 고도화될 수도, B로 변화할 수도 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A, A', B 중 정답은 없으며 A, A', B 모두 나름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저자는 A와 A'를 뒤떨어지는 것, B를 훌륭한 선택으로 인해 한층 진보한 것으로 보았다. 특히 A와 A'에 대해 이야기할 때, 유럽 외 지역을 예로 들어 설명하곤 하였는데 그 부분이 조금 불편했다.
이렇듯 아쉬운 점이 없진 않지만 우리가 매일 너무나 당연하게 접하고 있는 개념(놀이)의 의미를 곱씹고 당대 지배적이었던 생각에 의문을 표하며 자신만의 생각을 써 내려간 점, 그 내용이 반 세기가 넘게 흐른 지금까지도 유효한 점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8
특히 놀이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간단한 놀이라면 앞서 살펴본 네 가지 유형 중 하나에만 속하겠으나, 현대 사회 속 대부분의 놀이는 복합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특히 내가 몸 담고 있는 프로젝트는 다양한 콘텐츠를 포함하고 있는 대규모 다중 접속 역할 수행 게임으로서 네 가지 속성을 두루 확인할 수 있다. 다채로운 흥밋거리가 있기에 많은 분이 게임을 찾아주었고 오랜 시간 정착해주었으리라. 게임 속 네 가지 속성이 모두 수준급으로 구현되고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돼 모든 이용자에게 끊임없는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떨어져 보인다. 따라서 나의 게임, 피쳐가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고 그 매력을 어떻게 극대화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이 책이 놀이를 만들어가는 이들에게 던지는 숙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